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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거진 김원봉 색깔 논쟁
  • 남기창 기자
  • 승인 2019.06.0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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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요인들과 귀국을 기념해 1945년 12월 3일에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서있는 사람이 약산 김원봉이다./온라인커뮤니티

(서울=포커스데일리) 남기창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거론하면서 정치권에서 이념 논쟁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추념사의 의미는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사회통합 차원에서 거론했지만 야당에서는 김원봉의 월북 경력을 들어 추념사를 반박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에 야당은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김원봉을 언급한 문 대통령을 비판했다. 특히 야당은 여권이 본격적으로 김원봉을 서훈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앞서 지난 3월 27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국가보훈처가 김원봉의 서훈 수여를 의견 수렴하는 것과 관련해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이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나 원내대표는 "좌파의 독버섯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고 있다"면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드디어 정부의 본심을 드러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는 당일 페이스북을 통해 "그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다면, 우리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는 구절을 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저승의 김원봉 본인이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라고 반문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노덕술의 후예인 친일파 토왜들이 활개를 치는 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청와대는 이념이나 정파를 뛰어 넘자는 것이 대통령 발언의 원래 취지라고 설명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한미동맹이나 국군 창설 뿌리 언급과 관련해서는 통합된 광복군을 기초로 한 것"이라며 "원래의 취지를 인지해주고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약산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19년 삼일운동을 뼈아픈 실패로 규정한 김원봉 등은 오직 의열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 믿고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시작한다. 

김원봉 등은 당시 대표적인 민족독립운동가인 이회영‧이상룡 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6개월간 군사학 폭탄제조법 등을 배운다.

이후 같은 해 11월. 길림성 통화현에서 조선 청년 13인이 모여 그 유명한 의열단을 구성한다.

의열단 13인. <사진제공=독립운동가 김상윤 선생 유족/포커스데일리DB>

의열단은 밀양동화학교 출신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한다. 김원봉을 비롯 김상윤 윤세주 한봉근 한봉인 곽제기 이성우 그리고 의열단 고문을 맏은 황상규 김대지 선생 등이다.

4~5년의 활동 후 의열단은 일제 경찰의 제1 제거 대상이 됐다. 주로 중국과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열단은 일제 경찰의 눈엣가시였다. 일제의 안위를 위협했기에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이었다.

실제 당시 상해는 일제경찰과 밀정들이 김원봉과 김상윤 이종암 등 의열단 핵심요원을 제거하기에 혈안이었다.

김원봉 단장은 단원들과 회의도중 두 번이나 밀정의 권총공격을 받았다. 1925년이 되자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 열풍과 압박으로 의열단의 활동은 급격하게 위축됐다.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중국내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었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된 후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빌미로 북에서 숙청됐다.

하지만 1952년에는 6.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김일성으로부터 훈장을 받아 그간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선정에서 제외됐었다. 

하지만, 학계에선 김원봉의 월북 이유가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로 규정된 노덕술 등 친일파에게 수모를 당해서라는 평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친일경찰 노덕술이 해방 뒤 다시 경찰 간부가 돼 김원봉을 체포해 모욕을 주고 뺨을 때렸던 일이 있었다. 

당시 김원봉은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고 울분을 삼켰다는 일화가 있다.

남기창 기자  nkc1@ifoc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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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2019-06-08 08:50:00

    <6.25 살인자>

    공로가 크면 살인자를 덮어주고
    공로자는 살인해도 되는 나라를
    만들지 맙시다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되면
    상을 줄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나쁜 사람이었다면
    상을 줄수 없다는 말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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