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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배 칼럼] 유신의 '교훈'
  • 김정배
  • 승인 2019.10.1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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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배(문학박사ㆍ칼럼니스트

10월이 오면 10.16 부마항쟁, 10.17 유신, 10.26 박정희 피살 등 아픈 기억이 어제 일처럼 다시 떠오른다. 물론 억울하든 통쾌하든 기억의 무늬는 국민 각자의 몫이겠지만.

요즘 다수의 국민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생각이 다른 상대를 적으로 대한다. 일부 정치인, 지식인, 언론은 거짓과 선동을 일삼는다. 이런 현상을 보면 혹시 유신의 '망령'이 살아있나! 섬뜩한 느낌이 든다.

누구든 역사 경험과 기억에 근거하여 자신의 가치와 태도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의 태도에 각별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왜 유신을 해야 했는가?' 라고 묻는 것은 해묵어 보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이다. 박정희 추종자는 물론이고 반대편 국민에게도 해당된다. 어떤 주장이든 특정 세계관과 가치관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다시 현실 인식과 미래 전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안보위기' 대응 혹은 '종신집권' 욕망 때문에 유신이 필요했다는 통념과는 달리, 좀 더 명확한 논리와 확인된 사실에 기초하여 유신의 이유를 새롭게 이해하고 나아가 교훈도 얻기 바라는 까닭이다.

박정희는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과 1972년 2월 '중미화해(rapprochement)'를 미국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와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해체라고 이해했다. 한국은 "더 이상 동서 대결의 최전선(frontier)이 아니게" 된 것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은 그러한 흐름을 일정하게 반영한 '사건'이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속내야 어떻든,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1970년대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달성하자"는 선언적 대의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냉전구조 해체와 남북대화 진전은 심각한 '딜레마'로 작용했다.

박정희는 동아시아질서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1971년 12월 6일, 미국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여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국민의 통일의 열망을 부추겼다.

박정희가 그처럼 모순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대화가 박정희와 추종자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취약한 정권을 유지한 결정적인 수단은 냉전 이념과 북한 위협 담론이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박정희의 본능적 의심이었다. 그는 미국의 한국 공약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강대국의 흥정 과정에서 한국과 자신이 희생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는 미국이 대만을 '제물'로 삼고 베트남을 "버리고 있다(selling out)"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새로운 안보환경에서 미국이 북한을 남한과 동등하게 대하고 유엔 기구를 해체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결국, 박정희는 정권의 불안정 가능성과 미국과의 관계 악화 가능성을 앞에 놓고 어떤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출구를 말하기 전에 두 가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박정희는 자신과 정권을 민족 혹은 국가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는 것을 국가와 민족이 살길이라 믿었다. 그의 추종자들 또한 박정희만이 민족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믿었다.

둘째, 박정희는 남북대화 과정에서 일사불란한 북한체제가 매우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박정희는 1967년 대선에서 부정을 저질렀고 1971년 대선 때도 온갖 부정 수단을 동원했지만 힘겹게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선거를 치르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통일 논의가 본격화 되면 국론통일은커녕 정치적 사회적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박정희는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더라도 정권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실적으로 선거제도를 바꾸어 종신대통령이 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유신,'평화통일'을 명분으로 종신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길,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정부는 유신을 발표하기 수일 전 기존의 남한 헌법이 "미소 양극체제 하에서 만든 것으로 반공산주의 원칙을 담고 있어 남북대화를 받아들 수 없다"고 전제하고 "대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체제"를 만들기 위해 유신을 단행할 것이라고 북한에게 통보했다. 북한은 의아해 하면서도 받아들였다.

발표 23시간 전 미국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미국을 믿지 않고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반하는 길을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미국은 박정희의 길을 막을 수 없었다. 미국의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은 종신독재체제 구축을 위한 쿠데타였다. 박정희의 그릇된 신념과 관성적 독재, 그리고 정권위기 가능성에서 비롯된 지극히 사적이고 파당적인 야욕이 불러 낸 '괴물'이었다.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심성(mentalites)에 갇혀 파당과 조직 이익을 위해 민족과 국가를 들먹이며 거짓과 선동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자들은, '역사를 거스른' 박정희의 기만과 위선과 야욕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비극적 종말'의 복선(伏線)에서 교훈을 얻기 바란다.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註).

김정배  press@ifoc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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